1.
외국나가 언어가 달라 답답했던 적이 있으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한국인들끼리도 말이 안 통하는 경우가 있나 봅니다.
이곳 중년 훈련을 담당하시는 한 형제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면담시 한 자매님에게 왜 훈련에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답니다.
그 자매님이 이렇게 답변을 했답니다. "말이 안 통한다고 우리
형제님이 떠 밀어서 왔어요. 저는 지금도 훈련에 대한 부담이
없어요. 형제님 저좀 도와 주세요."
그 자매님 남편은 중년훈련을 받으려고 아침에 두 시간, 끝나고
두 시간 차로 가는 일을 두 학기를 꼬박했습니다. 오전에 훈련
수업듣고 오후엔 자기 하던 사업도 하면서....
그리고 아내가 훈련받도록 아이 셋을 자기가 보면서 살림하고
사업까지 하고, 아내는 아예 합숙하는 훈련에 보냈습니다.
자매님도 처음엔 떠 밀려 왔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훈련을
누렸고...어느덧 1년 후 무사히 졸업까지 했습니다.
아마도 지금은 두 분이 전보다는 더 의사소통이 원활할 것입니다.
2.
함께 교회생활을 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병에 물이 반이 담겨있는데 어떤 분은 '반 밖에 없네'하고 다른
분은 '아직 반이나 남았네'라고 할수 있습니다. 전자는 염려와
불평이 나올 가능성이 높고...후자는 감사가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말이 안 통합니다.
또 헌신의 정도가 차이날 때 말이 안 통할 수 있습니다. 같은
상황을 놓고도 한쪽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할 것이고, 다른 쪽은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것입니다. 말이 안 통합니다.
그 관심하는 뿌리가 무엇인가에 따라서도 이견이 도출됩니다.
한 쪽은 겉으로는 이런 저런 핑계와 이유를 대지만 그 이면엔
늘 '나'라는 자신을 관심합니다. 다른 쪽은 반대로 나는 둘째
문제이고 어떻게하면 '하나님'의 필요가 채워질지를 생각합니다.
3.
그래도 위와 같은 차이는 적당히 타협하고 조절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장 답답한 경우는 (계시로 인해) '본 것이 다를 때'
입니다.
오늘 아침에 요한일서 1장을 읽고 추구했습니다. 1-5절까지 각
구절마다 소위 '키 워드'(핵심 단어)가 있습니다. '말씀'-'생명'-
'생명의 교제'(교통)-'기쁨'-'빛'이 그것입니다.
국어 상으로는 어려울 것이 없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그 실재
의미를 보고 얻었는가를 진지하게 점검해 본다면 그렇게 간단
치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생명'이란 말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그러나 생명은 과연 무엇입니까? 생명이 무엇인지 보고 얻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말이 잘 안 통합니다.
어떤 단체는 생명을 성경공부 통해 성경지식 쌓아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렇게 가르칩니다. 생명이 하나의 인격이며 주 예수
자신이라는 빛이 부족합니다.
또 어떤 유명한 신학자는 생명이 주 예수님 자신임은 알지만 그
생명이 저 하늘 보좌에만 있고 우리 안에는 계실 수도 없고 계실
필요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분들과 '생명'이란 주제에 대해
대화하다 보면 말이 잘 안 통합니다.
그런데 생명이 무엇인지도 알고 생명을 받은 사람들끼리도 말이
안 통할 때가 있습니다. 즉 '생명의 교제'에 대한 계시가 부족
하여 생명의 흐름이 끊어지는데도...왜 그런지에 대한 인식조차
없는 경우는...다른 쪽은 참 답답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생명의 교통을 유지하는 두 가지 조건에 대해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요일1:5-2:11). 그 하나는 '죄들을 자백하는 것'
이고 다른 하나는 '형제(지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죄가운데 있으되(당연히 영적으로 메마르게 됨) 그 상태의
심각함을 모른 채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주장하고, 또 다른 지체들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판단하고 정죄한다면...그렇지 않은 상대방과
말이 안 통하는 수가 있습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사는 가정들은 복된 가정입니다.
이런 가정들이 더 많이 생겨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갓맨 형제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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