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베란다로 나가 작은 꽃밭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잎사귀들을 이리저리 들춰보니 와우......
꽃나무들 사이사이에 고운 털옷을 입고
고사리처럼 새싹이 자라나온 것이 보이네요.
혹시나 하고 앙상한 가지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새싹들이 촘촘히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기다란 나무 위를 기웃거려보니 연한 순으로
벌써 한 뼘이나 자라고 있고, 꽃밭을 자세히 살펴보니
흙 위로 뾰족뾰족 새싹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아, 이렇게 반가울수가.........
한참동안 바라보았는데도 실증이 나지 않네요.
보드라운 솜털, 연한 순, 연두색 잎사귀...
생명은 참으로 기이합니다.
차가운 겨울동안 묵묵히 버티고 있다가
때가 되어 봄볕을 타더니 마른잎들 속에서
총총히 자라나오는 새싹들이 참 예쁩니다.
비오스(Bios) 생명이 이러할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조에(Zoe) 생명 또한 동일한 원칙인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안에 감추어진 생명이
이렇게 새싹으로 표현될까..
바울은 질그룻인 자신안에 보배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이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려 함이라'(고후4:7)
나는 낮고 하잘것 없는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원래 나는 죄있고, 타락했고, 비천합니다..
그러한 내 안에 보배이신 주 예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어떠한 긍휼인지요...
그분은 여러 환경을 통하여, 고난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시간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우리안으로 조성되고 계십니다.
아침에 고후4장을 읽는데 첫구절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the Ministry)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사역하는 직분을 가졌으므로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직분을 가진 자로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뿐 아니라 각 사람들 양심안에서
자신을 스스로 천거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이 제 존재를 계속 씻었습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안에 있는데,
우리의 겉사람, 천연적인 사람, 육체에 속한 것들로
인하여 이 생명은 표현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새언약의 사역을 위하여 사도들을 다루심과 고난과
좌절당함과 질병과 가난과... 이러한 것들을
통해 그들의 겉사람을 소멸(소모)시키고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어떤 문제나 어러움이나 반대나 핍박이 없었다면,
그가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면 바울 안에 나타났던 생명은
신약경륜에 합당하게 그렇게 순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 다른 사람들안으로 생명을 분배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면 항상 우리는
그가 십자가의 죽임을 당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사랑스런 지체들이 많이 떠오릅니다.
늘 자신을 부인한 주님, 또 바울,
그리고 이 사역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십자가를 아는
비밀스럽고 감추어진 지체들... 많은 지체들.....
너무나도 귀하고 사랑스럽고 누림과 감상이 있습니다.
차가운 겨울에는 잠시 묵묵히 버티고 있지만,
저항할 수 없는 자연의 순환에 따라 따뜻한 햇볕을 받을 때,
아... 언제 저렇게 자라 올라왔단말인가!!
사망을 이기고 여기저기 새순, 새싹들이 자라 올라온것 같이
겉사람은 소모되고 보배가 여기저기 향기로써 흘러나옵니다..
----------------------------------------- 글쓴이 : H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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