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침에 집회소에 가서 개인기도 시간에 제가 하는 일은 일정치 않습니다.
어떤 때는 그 한 30분 동안을
그야말로 기도(자백하고, 간구하고)만 할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한 두 구절의 말씀을
여러 번 먹을 때도 있고
오늘처럼 성경을 그냥 기도하는 영으로
주욱 읽어 내려가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찬송만을 하거나,
주님의 이름만을 외쳐 부를 때도 있습니다.
어찌하든 존재를 열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또 그분께 아뢰는 접촉의 시간을 갖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출애굽기를 주욱 읽어 나가다가
제 시선이 출23:5에 머물렀습니다. 한번 더 읽고
지나가려다가 이내 다시 머물러서 그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너를 미워하는 사람의 당나귀가
짐 밑에 넘어져 있는 것을 보거든'...
아 이거봐라 상황이 참 묘하구나
그냥 나귀가 짐밑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니라
'너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라...'
이럴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보통은 그 사람이 깔려
넘어진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의 나귀가 그리된 것이니
못 본척 지나갈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인격은 역시 고상하셨습니다.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
킹제임스 성경은 '삼가 버려두지 말고'를
'wouldest forbear to help him' 이라고 하여
'돕고 싶지 않더라도'
그를 도와 짐을 부리라 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성경 역본들 역시
'그것을 (너를 미워하는 사람의 문제로 남겨 두어)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의 의미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법률내용은 그 법률 제정가들의 사상과
사람됨의 어떠함을 반영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 다 사랑하십니다. 그것도
그들을 위하여 그분의 독생자를 내어 주어 죽게 하실 만큼...(요3:16).
그분은 악인과 선인을 차별 않고
햇빛과 비를 그들 모두에게 고르게 내려 주십니다(마5:45).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그렇게 할줄 압니다.
끼리 끼리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만
문안하며 서로 좋다고 오고 가는 것은
'이방인들'도 그렇게 합니다(마5:46-47).
하늘의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들은
그 이상의 미덕을 보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길 원하십니다.
오늘 아침에 이러한 그분의 마음을 한번 더 깊이 만지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최근 들어서 교회 안에 목양이 거듭 거듭 반복되이 강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목양을 하더라도 선호를 따라 선별적으로 하거나
아니면 자기 일에 치여 마음은 원이로되 실행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참으로 참 목자장이신 우리 주님의 이러한
마음을 공유한다면 특별히 어떤 일을 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와 삶 자체가 목양일 수 있습니다.
설사 그가 어떤 이유로 서먹해졌거나
나를 미워하거나 내가 미워하는 사이가 되었다 해도
그의 이런 '나귀 깔리는 사건'을 볼 때
기꺼이 팔을 걷어 부치고 도와준다면 이를 계기로
더 좋은 사이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건 몸의 지체들이나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라도 미워할 권리가 있을까요?
'주님 저는 이런 저런 이유로 저 지체가 못마땅합니다'라고 했을 때 '너도 그러냐?
사실은 나도 그렇다. 어쩌면 그렇게 그가 하는 짓마다
내 눈엔 꼴보기 싫으냐 '라고
주님의 맞장구를 이끌어 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아니 아예 없습니다).
목양할 대상을 찾아 나서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의 치우치고 선호가 있고 이기적이고 병든 마음을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를 더 갖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길 가다가 우리를 미워하는
그 사람의 '당나귀'가 짐 더미 밑에 깔려 있어서
어쩔줄 몰라 하는 상황을 만나면 주저없이 팔을 걷어 부치고 도와
그가 곤경에서 벗어나게 할수 있을 것입니다....(갓맨 형제님 글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