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루퍼 형제님의 마지막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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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1-14 , 조회수 (2184) , 추천 (0) , 스크랩 (0)

 

 

본 특별집회는 2003년 10월 3일 Latham Springs field 침례교 수양관에서 개최된 미국 남서부 諸州(제주) 연합대학생 집회에서 주신 단루퍼 형제님의 첫번째 msg입니다. 전체제목은 '주님의 다시오심을 이끌어올 하나님의 이 땅위에서의 움직이심을 위한 그분의 젊은이들을 부르심에 관한 관점과 필요성'입니다. 이것은 단 루퍼의 이땅에서의 마지막 msg로서 그의 삶에 대한 회상과 그분의 유언이 담긴 것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가 생의 마지막을 직감하고 젊은이들에게 전달하는 그분의 부담을 주님의 긍휼로 우리가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청취를 돕기위해 개략 번역한 것으로서 original text는 freechal.com/toliveischrist의 '읽을만한 것'에서 실시간으로 청취할 수 있습니다)


이번주에 저는 정말 정말 주님을 앙망하는 것은 여러분이 다만 집회에서 뭔가를 볼 뿐만이 아니라, 젊은이와 관련하여 뭔가를 보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34년 전에 제가 이곳 래텀 스프링스 침례회 수양관에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왔습니다. 신입생으로 18세의 예비 대학생으로 왔지요. 저는 주님을 만났지만 회복을 접하지 못하고 교회생활을 접하지 못한 채로 이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그리스도의 풍성을 찾아내고 싶었지만 이곳 오리엔테이션은 실망스런 것이었습니다. 같은 장소에 오랜 만에 오는 것은 큰 즐거움입니다. 40년은 성경에서 정말 중요한 숫자입니다. 그것은 시대의 전환을 상징합니다. 그 옛날 제가 이곳에 있을 때 사람들은 뭔가를 성경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었고,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저는 한가지 이런 것에 자신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주에 제가 말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손 안에 우리가 온 존재를 드릴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긍휼로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긍휼로 이 시대의 사역을 찾았고, 그리스도와 교회를 찾았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긍휼입니다.



이번주 저는 무거운 부담이 있는데 특별한 젊은이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땅위에서의 움직임에 동참하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젊은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움직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그것을 몰랐지만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움직임을 가지고 있는데 동참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합리적인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몰랐었습니다.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신탁도, 최신의 이상도, 하나님의 움직임도 , 최신의 계시도, 신선한 말씀도 없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젊은이를 부르심에 관한 관점과 필요성을 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아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은 수 많은 사람들을 부르실 것이고, 우리는 모든 것들을 알 필요는 없지만, 그런 주님의 부르심이 있을때, 깊은 속에서 '예'라고 반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분의 이 땅위에서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런 움직임으로 보고, 약간 이해를 한 후에, 완전히 그것을 위해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런 반응은 전적으로 재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영적으로 말해서 재미가 있는 부분은 그리스도와 교회이지요. 그것은 항상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길에서 최상을 원하신다면 여러분의 온 존재는 그분의 부르심에 완전히 빨려들어가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모든 것을 팔아버리고, 완전히 빨려들어갔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은 너무 좋은 것이었습니다. 왜냐구요? 우리 하나님, 삼일 하나님과 삼일하나님의 중심성이신 주 예수님은 이 땅위에 움직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땅위에서 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거대한 위대한 움직임의 일부이며, 우리는 그분의 교통의 고리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분의 온 땅위에 펼쳐지는 거대한 거미집의 일부인것입니다. 6대륙에 펼쳐집니다.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움직임이 우리의 모든 분투와 모든 시간과 모든 행위들이 이것에 연결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못믿으시겠다면 조금만 더 시간을 보내보십시오. 주님과의 시간을 더 보내시고 말씀을 더 들으시고 그분이 무엇을 가지고 계신지를 보면 됩니다. 이 움직임을 우리는 지금 우리 눈으로 목도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주님의 움직임이요, 주님의 재림을 가져오는 요인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온 존재를 투자할 가치가 있습니다.

 

 

1. 초대교회 시대

하나님의 목적, 교회역사, 젊은 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함이 첫째 메세지의 제목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모든 교회역사를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상세한 것이 아니라, 큰 그림을 제시함으로서, 여러분들이 나중에 그 안에 섬세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삶과 그분의 가르침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든 것의 근거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성육신, 삼십삼년 반의 인생을 사심, 그분의 많은 것을 성취한 죽음, 그분의 부활, 그분의 승천, 그분의 보좌에 앉으심을 포함합니다. 사복음서는 이후의 서신서들, 특히 바울의 서신서들의 기반이 됩니다. 물론 우리는 바울의 복음에서 깊은 것들이 발전된 것을 알지만, 그럴지라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복음서에 계시된 그분의 삶과 가르침입니다.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안에 가져오고, 부활 안에서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가져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분의 모든 속극적인 것들을 끝내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중심이요 핵심입니다. 그분의 죽음의 실재는 모든 소극적인 것들을 종결시키고, 부활의 실재를 가져왔습니다. 이 모든 방면은 다 우리의 체험을 필요로합니다. 이것은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저는 이 학교에서 성경을 배우는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수 많은 논쟁이 진행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기발한 주장을 배웠는데, 그때 저는 속말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상상한 것이 아닌 진리를 말해주셔야죠.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행동과 말과 모든 사건들을 종합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왕국의 중심성이십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이죠. 마가복음은 다만 다윗의 충성된 후손이라는 관점만이 아니라, 노예구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겸비하고, 유순하시고, 작으시고, ...얼마나 좋은지요. 누가복음은 다른 관점인데 죄사함의 복음, 죄를 사하는 그리스도, 너무나 좋지요. 많은 높은 진리를 말하는 대신에 많은 죄사함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하늘에 속한 복음인데 그분은 신성한 생명을 우리가 체험하는 것이 부담입니다. 이것은 다른 각도이지요. 동서남북이 있듯이 네 관점의 복음서가 있어서 이 그리스도를 알게합니다. 신약의 사역과 사도바울의 서신은 하나님이 주신 분량에 따라서 그렇게 놓은, 너무 높아서 다른 사도들도 알기 어려울 정도록 높은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의 주된 강조점은 이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역사적인 예수가 아니고, 기록적인 예수가 아니라, 당신 안으로 들어오고, 당신 안으로 역사해들어와서, 당신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게하고, 그래서 주님의 다시오심을 가져오는, 그분을 끌어내리는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한 몸, 실행적으로는 지방적인 교회로서 나타나는, 빌라델비아 교회로 상징된 그 교회가 되게하는 복음이 바울의 복음입니다. 어떻게 그분이 우리안에서 자라게 할 것인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마시고 호흡하는가, 당신의 장래는 어떤가, 영과 혼을 어떻게 분리하는가...이 모든 것을 바울의 복음은 알게 해 줍니다. 제가 대학에 왔을때 저는 마치 이디오피아 내시처럼 알지 못하고 읽었지만, 결국 누군가가 이것들의 의미를 알게해주었습니다.


내가 그것들을 알게되었을 때, '맞다! 맞다! 맞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확신을 가져야 하고 만져져야하고 보아야 합니다. 신약의 사역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가 소유하고, 우리가 조성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분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분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실재가 됩니다. 나는 너무나도 이 서신들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나로 주님과 교제하는 법을 알려주고, 나는 이 서신서들을 사랑합니다. 어떻게 주님 안에 들어가고, 어떻게 주님께 참여하고, 어떻게 그분과 하나되고, 어떻게 그분 안에서 감취어지고,....그분으로 나는 완전히 미쳤습니다. 특별히 14서신을 너무 사랑합니다. 이것들을 너무너무 여러번 읽었습니다. 나는 이 서신서들에 대해서 박사학위가 하나 둘 셋이나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우리를 소극적으로 보는가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비난은 완전히 농담입니다. 어떠한 농담인지!!!!그들은 구원에 대한 얘기를 하죠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좋아요 구원에 관한 얘기...저도 있지요. 누구 먼저 할까요? 그런데 그것이 전부입니까? 이런 부류가 저를 괴롭게 할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들의 말은 어떠한 농담인지!

 

 


2. 교부시대

 

교부시대는 전체적으로 말할 때, 사람들을 잘못인도해서 300년간 폭풍이 일고, 신랄한 그리스도론의 논쟁이 있고, 그리스도인들은 알력과 분열을 일삼았는데, 그들의 학문적인 인식과 학문적인 총명성에 근거한 것입니다. 학문적이고 학술적인 논쟁이 그것의 근간입니다. 예루살렘도 아니고 알렉산드리아입니다. 학자적인 연구활동이 가장 흥황한 곳입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표적을 빗나갔고 모든 복음적 진리를 희석시켜서 매우 어렵고 철학적인 학문으로 만들었습니다. 300년의 논쟁끝에 결국, 6세기에 이르러서는 결국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립을 가져온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런 혼돈을 배경으로 하여 성장했는데, 사람들이 그이상 좋은 것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게 커진 것입니다. 이들은 대략 1000년간의 암흑시기를 가져왔는데, 왜 어둡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뭉개지고' 봉해지고 라틴어로만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알 수도 없었고, 극소수만이 성경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도 라틴어로만 진행되었습니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구교가 그렇게 틀렸다면 어떻게 세계적으로 흥황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점점 천년의 기간이 걸려서 된 것이며, 그것의 지정학적인 요인도 있었습니다. 신대륙의 발견후에 수백년이 걸려서 현 시대에 퍼진 것인데 계시록에서는 구교를 모든 물위에 앉은 음녀 바벨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카톨릭이라면 화내지 마십시오. 그러할지라도 잘 들어보십시오. 구교는 교회에서 가장 적은 성도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계급을 실행합니다. 가장 작은 카톨릭 신자도 전부가 성직자들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50만명이나 되는 미국의 구교신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온 땅을 보십시오. 그것은 거대한 사업입니다. 한 사람이 다스립니다. 그리고 20여명의 홍의주교가 있는데 이들은 마치 CEO와도 같습니다. 그것은 지방교회가 아니라 수 백만명이 있는 거대한 땅에속한 우주교회가 된 것인데 이 교회에 수 백만의 사람들이 걸려들었습니다. 이것의 비결은 성직자계급의 뻗어나감을 통해서 온 땅을 점령한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두가지의 혼합입니다.

 

이것은 서로 상이한 두 가지인데, 왕이나 여왕들에 의해 다스려지던 수 세기의 정치체제를 통해서 구교에서 파송한 정치 부서(Catholic Bull or Cannon)가 있어서 이들에게 압력을 가한 것입니다. 말을 잘 안들으면 귀국에는 더이상 성찬을 집행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성찬이 구원이라고 믿어지던 시대입니다. 더하여서 당시에는 정치와 종교가 서로 분리되는 것임을 알지 못던 시기여서 하나님의 왕국을 이땅에 가져오는데 정치도 필요하다고 여겨서 적극적으로 섞은 것입니다. 구교는 성직자 계급의 번식을 통한 온 세계의 확장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모든 교회역사는 로마 천주교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소위 하나님의 움직이라는 것이 있다면 본성과 본질에 있어서 주님의 재림을 가져올 그런 움직임이 이땅에 있다면 여러분은 그것에 자신을 드릴 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 움직임이 있다면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존재를 드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3. 중세시대

 

구교에서는 성찬이 구원의 길처럼 되어있었습니다. 주님은 내가 성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나요? '성찬적 조작'이라고 하는 것이 구교에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에게 가고, 그녀가 아들에게 가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고, 하나님은 바쁘니까 ...하나님이 지나친 짐을 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쟎아요? 성찬이 구원이라는 것, 성직자들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의식을 하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지 그리스의 실제적인 몸이 되어 사람이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미사는 그리스마스입니다. 시간이 가면서 그리스도 미사가 생긴 것입니다. 바티칸은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서 왕들을 협박하고, 왕들은 채찍을 가지고 성도들을 협박해서 개신교보다는 구교를 선택하기를 강요했습니다. 협박을 두려워한 왕들이 굴복하게되고, 미신이 흥황해서 돈으로 산 면죄부가 있을때, 죄를 아무리 지어도 면죄부만 사면 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면죄부는 육체를 따라 악을 행하도록 길을내주고, 이런것이 수천년 간 계속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경배의 장소만 바꾸면 됬지 자신들의 변화는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구교는 각국의 전통을 이름만 바꿔서 교회에 도입한 것입니다. 자신의 이전생활을 특히 이전의 이교적인 종교생활고 인물들의 경배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도록 한 것입니다. 이스터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터 토끼를 기념하는데, 토끼는 다산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터는 풍요의 신을 경배하는 것을 카톨릭이 이름만 바꿔서 도입한 것입니다. 부활절 주일이란 것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것을 기념합니다. 크리스마스는 가장 최악인 것입니다. 교황의 모자는 물고기의 신인 다곤의 제사장이 교황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것은 너무 강해서 아무것도 이것을 바꿀수가 없습니다. 그런 방식을 통해서 그들은 사람들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없고...

 

 


4. 종교개혁시대

 

개신교가 일어났을때,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고 그들 중 인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구원의 길은 사람이 만든 이교적인 사기극에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다시 점검하기를 선언한 것입니다. 1483-1546에 살았던 짧았지만 매우 심오한 삶을 산, 그는 구교 수사였지만 성경을 갖고 일어나서 '아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정치세력이 과도한 세금의 문제로 시달리던 터라서, 그는 정치권의 후원을 입게된 것입니다. 그는 95개조의 반박문을 성당 문에 밖은 이후로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그는 '아니요'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보여주가 그렇지 않으면 전혀 인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오직 성경으로'로 알려진 것입니다. 울리히 즈빙글리는 루터와 동일한 것을 보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들은 절대로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울리히 즈빙글리는 신약의 전체적인 인식에 있어서 훨씬 앞선자였지만, 루터는 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완고한 독인인이었고 그점이 하나님께 사용된 한 요인이기도 하겟지만 그는 즈빙글리와 같은, 형제들과 하나되는 문제는 그만 '날려버렸습니다'. 그러나 즈빙글리의 저작은 그 당시에 잘 받아드려졌습니다.


지금 말하려는 두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그 시대를 말하자면 먼저 구텐베르그가, 최초의 성경인쇄가 시작되기전 75년 전인 1348년, 인쇄기를 발명했습니다. 이 인쇄기는 많은 책을 번역했지만 특히 성경을 영어와 다른 많은 언어로, 그의 발명으로 인해 동일한 페이지를 대량으로 양산했기에, 수기의 성경기록을 대체했는데, 정말로 수많은 수도승들이 무슨 내용인지 라틴어로 알지도 못하면서 수기로 성경을 베껴쓰는 일을 대체한 것입니다. 두번째로 언급할 사람이 크리토퍼 콜럼버스와 그의 미국을 향한 항해는 신대륙을 1492년에 발견했는데, 1492년은 루터가 9세였을 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대륙은 구 대륙에서 핍박을 밥던 참된 믿는이들의 피난처로 예비되었던 것입니다. 주로 먼저는 미국으로 그리고 아메리카의 다른 대륙으로 피난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남미는 카톨릭의 길로 갔고, 중미는 개신교 여러 교단들의 길을 취했지만 주로 카톨릭의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출현은 개신교의 발흥과 일치합니다.

 

개신교는 카톨릭의 갖은 우스운 것들, 즉 성찬식에 의한 구원, 성모 마리아,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사제적 중보자들, 행위로 인한 구원, 따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주님 자신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한다는 큰 계시를 개신교가 회복한 것입니다. 스페인과 그당시 그의 연방들이 다 지금도 카톨릭입니다. 그러나 독인은 국교인 루터교입니다. 그것은 카톨릭과 개신교의 잡종, 개신교와 카톨릭의 중간쯤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훨씬 순수한데 미국은 종교개혁에 근간을 둔, 비교적으로 말할 때, 가장 순수한 개신교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분의 이가 개신교였고, 삼분의 일이 카톨릭인 채로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지금은 대략 반반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최초로 개신교라는 깃발로 형성된 교회이기는 하지만, 카톨릭의 거대한 영향에 굴복되어서 삼분지 일의 개신교, 삼분지 이의 카톨릭 정도로 구성된 '영국 교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복음주의의 영향으로 영국은 종교개혁이후에 수백년동안 영국은 온 땅위의 주님의 움직임의 기초기지였습니다. 예를들면 웨슬레, 휱필드같은 사람들인데, 이들은 소위 성전에서 전파한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산에서, 주님이 하던것과 같이 복음을 전했는데, 이런 사람들의 사역을 통해서, 영국은 철저히 복음에 익숙하게 되었고, 매우 개신교적이 되었습니다. 대략 300년 가량을 주님은 영국을 일으켜서 온 땅의 복음화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제 중유럽에서 일어났던 모라비안 형제회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그들은 진젤도르프 백작에 의해서 인도되었는데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었지만 그들 가운데 씁쓸한 분열로 이끌어간 '흉측한 것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의 의견이었습니다. 그들 각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잘 알았지만, 그들은 하나라는 문제에의해서 군형이 잡혀지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진젠돌프는 그들 각자와 계약을 써서 서명을 하게 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단체를 대표하는 모든 신조를 내려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후에 그들은 성령의 침례를 받게되었고, 그들의 부흥과 영향력은 온땅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공과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의 공과입니다. 무슨 일에서든지 하나가 되십시오.

 

 


5. 근세시대

 

복음주의는 영국의 또 한 방면입니다. 조지밀러 2백만개의 기록된 기도 응답을 받으사람인데, 일만 명의 고아들을 양육했던 사람인데 그 시절에 돈 한 푼을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기도로 하나님의 공급을 얻었던 사람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으로 갔습니다. 수 백만 약 6백만의 당시 중국인구에 대해서 부담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는 중국내지 선교회를 창시해서, 주님이 말씀하시고 주님이 공급하신다는 믿음의 원칙을 세운자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중국인과 동일하게 처신함으로 중국인의 마음을 얻었고 수 많은 영국인들이 뒤를 이어서 중국은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는 많은 부담을 지고있다가, 결국 병이났는데, 주님이 이 땅위에서 이런 산고를 맛보게한것은 사후에 있을 고통이 얼마인지를 미리 감상하게 하신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후에 성경을 읽다가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사신다는 진리를 발견하게되었습니다. 그가 이 계시를 본후에 그는 변화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펄젼은 런던에서, 가장 웅변적인, 가장 성경지식이 밝은 사람이었는데, 그의 진리는 놀랍지만, 그는 런던 도시 장막교회를 설치하고, 매번 5천명을 구원시켰는데, 매번 그랫습니다. 마이크도 사용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그의 설교는 엄청난 불이 쏟아져나오는 것과 같았는데, 그의 중심주제는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라는 것이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제를 벗어나면 거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17에 구원을 받아서 정확하게 40년을 섬기다가 죽었습니다. 저도 30일이 지나면 40년을 섬긴 셈이 됩니다. 이 사람은 모세가 40년을 섬기고 죽은것과 같이 이 사람도 그랬습니다. 저도 많은 때 '주여, 저에게는 40 이상을 주셔야 합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 당시에는 40년을 섬기다가 죽는 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마이크도 없이, 그는 위대했지만, 홀로 죽었습니다. 그는 다른 주님의 사람들과 동일하게 시대의 사역자였으면서도, 인식이 그런식으로 되지 않고 '외로운' 사역을 하다가 죽은 것인데 당시에 시대의 사역자들은 서로와 하나되지 못했습니다. 홀로 사역을 하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결코 하나로 집중시키지 못했습니다.



이제 형제회의 움직임, 플리머스 형제회 움직임을 말해보죠. 아이레의 더블린에서 시작해서 잉글랜드로 확장했습니다. 그들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모든 점들을 가지고있었습니다. 교회사가들이 다 이것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약 1820-1840년간 지속된 운동인데, 주의 상에서 계급도 없고, 형식도 없고, 그 중에 하나가 다비형제입니다. 그는 주님에 의해 나중에 엄청나게 사용을 입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학자요 심지어 자신의 성경번역을 가진 사람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죠지뮐러도 이들의 친구였지만, 주된 부담이 고아원의 운영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런 사람들이 주님의 유일한 이 땅에서의 움직임에 대해서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이 당시에는 성경의 보급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주님의 빛비춤을 받음으로 엄청난 빛이 쏟아져 들어온 것입니다. 그들은 꿈을 꾸는것 같았습니다. 이들은 교회사상 가장 많은 빛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배의 주방장이던 형제회 소속의 한 형제에 의해서,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성경강해를 들었다고 합니다. 이상수 형제도 중국에서 7년동안 형제회의 단체에 있었다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다비와 벤자민 뉴턴이 두 주된 인도자였고, 멕킨토시의 모세오경강해는 압권입니다. 그의 책을 읽기 전에는, 대학시절에 구약의 제물들에 관한 얘기는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화목제, 소제,...등등이 모두가 그리스도,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저는 '와!!!'하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후에 제가 이상수형제를 만났을때, 그는 그런 제물들을 일상생활에 적용할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위대한 인도자는 주된 진리가 아닌데, 작은 진리의 중점에 불일치를 가짐으로 엄청난 분열을 야기시키고, 그 분열은 형제회의 간증에 종말을 가져왔습니다. 그 분열은 차후로 있게된 수 많은 분열의 기반이 된 것입니다. 이런 분열로 인해서 그들은 빌라델비아에서 미지근하고 생명이 없는 교회인 라오디게아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속생명 무리를 말해야합니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실행한 사람들입니다. 허드슨테일러가 인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과 교통할 수 있고, 주님을 살아낼수 있고, 주님 안에서 실재를 가질 수 있다라고 하는 사람들인데 대표적인 사람이 마담귀용입니다. 윌리엄 로우는 이런 속생명의 미묘함을 말로 훌륭하게 표현했는데, 약간은 생명에 관한 것이고 주로는 율법에 관한 것입니다. 그의 초기 저작이 '경건하고 독실한 삶 devout and pious life'이라는 것인데 제게는 전혀 영적인것으로 들리지 않는군요. 그가 후기에 훨씬 낳은 책을 썼습니다. '영의 능력'이라는 책인데 그 책이 정말로 도전적인 책입니다. 그는 종교는 그리스도없는 것이고, 생명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형식적인 카톨릭도 비하하고 죽은 개신교도 비하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죄를 한 아름 안고 지옥으로 행진하는 것이나, 오른팔에 헬라어 성구사전을 들고, 왼손에 히브리어 성구사전을 들고 지옥으로 행진하는 것이나 뭣이 다른가?'라고 말했습니다.

 

휴스턴에서 이상수형제님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형제님 이 책읽었습니까?' 그는 웃으면서 '예! 읽어보세요. 그는 모든 세상을 모독하는 사람인데 할말은 분명히 있는 사람이랍니다.' 그의 영향은 마담귀용에게 할말을 주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앤드류 머레이가 있습니다. 저는 그의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의 어떤 책들은 저는 20-30번을 읽었습니다. 그는 내적으로는 체험을 추구하고, 외적으로는 말씀에 기반을 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균형이 잡힌자였지요. 그는 요하네스버그에서 주로 사역하는 영국에서 보낸 선교사인데, 그는 배로 항해해서, 요하네스버그에서 약 5,000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큰 움직임이었죠. 그의 작품을 읽으면, 흥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수 새대를 지나면서 그의 일이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체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익을 준 것입니다. 제시 펜루이스는 그리스도에 속한 것의 일부인 '그리스도의 죽음을 체험함으로 이기는 생명을 삶'을 보았습니다. 오스틴 스팍스는 부활을 본 사람입니다. 죽음만 보아서는 안되고 부활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관점입니다. 이들은 다 좋지만 지방교회들을 통한 주님의 이땅 위에서의 움직임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생명은 너무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이 일으킨 사람들의 어깨위에 서지만 중단하지 않고 주님의 재림을 위해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6. 현대시대

 

이제 1600년대 이후의 미국으로 오겠습니다. 영국에서의 종교핍박이 있을 때, 청교도들로 알려진 무리의 추구하는 믿는이들이 네덜란드 일부와 신대륙으로 피신을 했는데, 그들 중 뉴 잉글랜드 부근에 플리머스 형제회에서 온 사람들이 정착한 것입니다. 이들은 매우 율법적인 문화를 가지고 엄격하게 생활하는 사는 사람들인데 그중에 조나단 에드워드가 있습니다. 그의 저작 중에 하나가, '화난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것인데, 끓는 물위에 거미줄에 붙은 벌레들과도 같은 죄인들...이들이 빠져나올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이러니까 그들은 엄격한 칼빈주의자들인데....사람들을 겁주어서 회개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들은 뉴 잉글랜드를 겁주었지만, 그들의 탁월한 요소는 캘빈주의가 하나님의 측면에 너무 많은 강조를 하다보니, 사람편에서는 모든 것이 정해져 있어서 사람의 의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구원을 기다리는 일을 할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사람이 일을 하고 하나님이 검사하고 승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과 하나님의 상호반응이지 사람이 다만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두 교파에서 두 목사가 강대상을 바꿔서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한 사람은 강한 캘빈주의자로서 사람의 의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캘빈주의자가 말하기를, '형제여! 하나님이 창세전에 이렇게 하라고 해서 우리가 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는 그것을 받을 수 없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것을 정했다면, 그렇다면 나는 이것을 하지 않겠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정했단 말이냐? 하나님이 정했는데 왜 나는 이렇게 바꾸었는까?'...종교는 이렇게 우습습니다. 우리는 행운아들입니다. 이 시대는 계시가 온전히 열려서 사용가능하고 우리의 체험이 되는 시대에 있습니다. 미국은 인디안들외에는 다 외국에서 도망온 사람들, 먼저는 유럽으로부터, 피신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서부해안은 중국인, 한국인,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용광로 국가로서 유일합니다. 저의 가족은 아칸소에서 왔다는데...저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헌법은 청교도적이고 신약의 빛에 따른 법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환란 중에 피난처로서 광야를 형성할 국가인 미국의 기초입니다. 아시아는 당시에 유럽에서 비등하던 종교적인 열성과는 관계가 없었지만 유럽은 난리가 났던 시기입니다.



1920년대에 주의 회복이 중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젊은 웥취만 니는 엠 이 바버에 의해 많은 온전함을 입었습니다. 그는 천재였는데 속독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수 없이 읽었고, 그와 다른 사람들이 상해에서 일으켜져서 그들은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발견해가가면서 복음에 불탔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쁜 유일한 것은 니형제님이 심장이 작아서 건강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생계에 있어서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배웠고, 건강에 있어서 믿음으로 지탱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가 폐병으로 사경을 헤메다가 일으킴을 받았을 때 회중 중에서 한 마디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 앞에 나타난 것과 같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사역을 재개했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 이 주님을 위한 야망이 가득했던 이상수 형제가 사역에 합류하여서 18년을 동역했는데, 그들이 인도자였습니다. 이 시기는 이상수형제가 그의 선배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는 시기였습니다. 그는 니의 모든 것을 들여마셨습니다. 그들의 사역으로 많은 지방교회들이 일으켜졌습니다. 니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은 처녀지였습니다. 역사를 보면 정말로 그랬습니다. 그것은 '날 이방문화'에서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러다 1930년대 후반에 중일전쟁이 발발해서 그들의 사역을 방해를 받았고 이것은 세계 2차 대전으로 연결되었죠.



그러다가 모택동이 정권을 잡으면서, 그런 급박한 상황이 죄어들어오면서 니는 모든 동역자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믿음을 잃지말라. 주님은 그분의 길을 가지신다. 나는 이곳에 머물고, 한 형제는 반드시 나가야 하는데, 그 형제는 이상수이다.' 후에 산책을 하면서 니는 말하기를 '이상수 형제, 우리는 일망타진을 당할 수가 있기 때문에 당신이 나가야 한다. 우리가 가진 것과 본 것을 가지고 나갈 사람은 당신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의 수고를 통해서 대만으로 동남아시아 각국으로 회복이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에, 그는 미국으로 왔습니다. 로스엔젤레스, 시에틀, 샌프란시스코 등에 주로 머물렀습니다. 니형제님은 미국이 애굽이라고 했는데, 그가 그 애굽에 온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미국의 주님의 움직이심 안에서의 용도를 보았습니다. 온 땅에 이르는 길을 본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을 증오했다고 합니다. 대만으로 돌아가려고 시애틀에서 비행장으로 가는데 주님의 다루심이 너무도 강렬해서 주님께 굴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엘에이에있는 샤뮤얼 챵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가 말하기를 '벌써 돌아가셨어요?'라고 하자, '아니요, 저는 지금 시에틀입니다. 형제님 집에 머물수 있을까요?'. 이것이 미국에서의 주의 회복의 시작입니다. 적은 일이 아니었죠.


저는 1965년에 회복을 접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어렸지만 그의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끊임없는 계시는 제게는 알라스카 만큼이나 거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책을 펴도 그리스도, 교회, 그리스도, 교회를 말했습니다. 그 당시에 그동안의 나의 모든 추구가 도돌이표 인생이요, 배회하는 인생이었음을 보았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하나님의 이 땅위에서의 움직임을 만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이후로 그런 느낌은 종교적인 모든 것에서 나를 뽑아냈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압니다. 나는 젊은 시절에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만에 있고 우리는 여기에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정말로 남은자들이 적은 것인가요?'. 주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요?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길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세상에 팽배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미국은 서적과 사람과 생명과 진리의 발송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율법에서 해방되려고 이곳에 오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씀을 사역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움직임에서 나가도 이 움직임은 계속 되어 완결될 것입니다.

 

 


7. 결론

 

이 움직임은 지난 40년 동안에 계속 가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밤도 이것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격이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건축되는 것이 하나님의 움직이심입니다. 이 땅위에서의 빌라델비아 교회를 건축할 것이고, 그것이 주님의 다시오심을 가져오는 주된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보십니까? 우리가 교회사의 움직임 안에서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다시오심과 상관없이 살겠다라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여러분은 어느날 뉴스를 듣게 될 것입니다. 내가 희망하는 것은, 정말로 희망하는 것은, 희망하는 것은, 여러분이 주님이 하고계시는 것을 위한 열정을 가지는 것이고, 수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드려서 주님의 마음의 갈망인 빌라델비아의 실재를 가져옴으로, 그것에 발을 들여놓음으로, 주님의 왕국이 도래하는 열쇠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 이 글은 2003. 10. 30일 단 루퍼 형제님 생전의 마지막 메시지를 김재광 형제님이 정리해주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