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구원론> 비판에 대한 재반박(中)


원세호님
2005-08-24 / 조회수 344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출처
원문

 

2.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속죄의 언약> 비판 재 반박


앞의 <서론 글-신화(Deification)>에 이어 이제 원세호 님의 구체적인 구원론 비판들에 대해 항목별로 재 반박하겠다. 먼저 매우 유감스러운 것은 원세호 님은 같은 내용들을 항목만 달리해서 여기 저기에서 중복해서 언급함으로 이에 대한 반박 역시 중복되는 면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내용은 어느 한 곳에 중점적으로 반박하고 그 후의 <중복된 비판>에 대해서는 간략히 다룬 후 앞글을 참고하도록 할 계획이다. 이러한 <중복 비판> 외에도 원세호 님의 비판 글은 <반대를 위한 반대>, <본문비판과 무관한 자기주장의 전개>, <불필요한 헬라어 문법 제시>, <비판 취지와 관계없는 장황한 성경인용>,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없는 짧은 본문 인용>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글쓰기는 독자들이 원세호 님의 비판대상인 원 저자의 취지를 파악치 못하게 하고 있다. 또한 원세호 님이 비판 글에서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원세호 님의 말 중 상당부분이 사실과 전혀 다른 왜곡 된 정보만 전달하고 있다. 또한 원세호 님은 자신의 좁은 견해를 토대로 상대방의 말은 너무 가볍게 <거짓말>로 단정하는 경솔함을 보이고 있다. 이런 특징들은 원세호 님의 구원론 글 전반에 걸쳐서 발견된다. 이제 각 항목별로 반박해 보겠다.


1) <원세호 님의 비판: ① '구속은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었다. 만일 예정이었으면 범죄도 예정일 것이 아닌가? 이러한 예정은 없다'라고 주장하여 성경의 예정을 부인한다...따라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영계에서 이미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며 주권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 그러므로 '워치만 니'의 주장은 거짓이다.>


** 반박: 워치만 니 원문을 인용하고 반박해 보겠다.


# <워치만 니 주장: ① "또한 구속의 사실도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시다. 이는 구속이 긴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오직 구속이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만일 구속이 하나님의 예정이라면 사람은 죄를 반드시 범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이러한 예정은 없었다>"(15.(교회) p.10).


위 글에서 보듯이 워치만 니는 성경이 말하는 <예정> 자체를 부인한 적이 없다. 단지 '무엇을 예정했는가' 하는 <예정의 대상> 이해에 대해 원세호 님과 다를 뿐이다. 즉 엡1:5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실 것>을 예정하셨다. 또한 롬8:29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실 것>을 예정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예정 된 것은 <하나님의 '휘오데시아'(아들의 명분)(갈4:5)가 되는 것>,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것>이다. 위 두 구절은 우리에게 <구속>이 예정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구속>을 예정하고 <인간의 범죄>를 예정했다는 기록이 있으면 원세호 님은 성경근거를 제시해 보기 바란다.


2) <원세호 님의 비판: ②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 없고 사람 구원은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 잡은 자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15. p.14 ; 워치만 니)...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셨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한 사람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구원하시고 땅을 다스리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 이유는 이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 다스리고 계시는데 땅을 다스릴 사람이 필요치 않고 인간들이 이미 치리권을 받아 다스리고 있다(창1:27-28).>


** 반박: 원세호 님은 자신의 비판 글에서 아래 워치만 니 본문 처음에 나오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라는 말을 삭제시켰다. 그러다 보니 원세호 님이 제시한 문맥은 마치 워치만 니가 <사람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왜곡되었다. 그러나 워치만 니 글의 원래 문맥은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은 다만 사람을 구원하는데 있지 않고, 더 나아가서 피조물인 사람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즉 원문은 'not only...but also' 의미의 문장임에도 원세호 님은 이것을 'not...but'구문으로 왜곡시켜 놓고 비판을 하고 있다.


원세호 님 주장대로 이 땅을 '인간들이 이미 치리권을 받아 다스리고 있다(창1:27-28)'면 왕국이 이 땅위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미 성취되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왜 지금도 원세호 님을 포함한 수다한 개신교인들은 '나라(왕국)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는가? 이미 이뤄진 일을 또 이루라고 기도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원세호 님은 지금 '땅을 다스리는 진리'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 <워치만 니 주장: ②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권위를 행사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 가운데 권세 잡은 자를 필요로 하셨다">(15(교회). p.14,하).


3) <원세호 님의 비판: ③ 인간은 하나님의 필요는 생각지 못하고 개인 구원과 같은 사람 좋은 것만 생각한다는 '워치만 니'의 주장은 거짓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었을 때(롬3:23) 구원하신 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의 은총이었다(요3;16). 그런데 사람이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롬5:12; 롬5:8,19) 구원하셨으며 피조물인 인간들의 구원은 단체가 대상이 아니라 개인이다(요3:16 ; 누구든지). 그러므로 '워치만 니'는 하나님의 생각을 극진히 하는 듯하면서 성경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 반박: 원세호 님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필요를 생각지 못한다>는 말을 반박하려면, 인간이 늘 하나님의 필요를 생각한다는 논리를 그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과 함께 펼쳐야 옳은 것 아닌가? 그럼에도 원세호 님은 이와 전혀 무관한 성경본문들을 장황하게 인용했다. 그리고는 워치만 니가 성경을 부인한다는 경솔한 단정을 하고 있다.


창세기 6:5는 '여호와께서 사람의....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한다. 이사야 55:9에서도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라고 하신다. 신약인 마16:23에서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라고 꾸짖으셨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마라'고 권했다(골3:2). 만일 이들이 원세호 님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필요만을 생각하고 자신들 좋은 것 생각하기를 거절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런 권면은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골로새서 3:2의 권면이 필요한 생활을 살고 있는지는 원세호 님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고 누가 성경을 부인하고 있는 것인가?


4) <원세호 님의 비판: ④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복음전파와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사탄을 손해주어 이 땅을 탈환하는 것이며 만일 못한다면 하나님의 인간창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라는 내용이 '워치만 니'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이미 이 땅은 인간 피조물들에게 주셨다(창1:28-30). 그리고 언제 땅의 통치권을 빼앗긴 일이 없다.>


** 반박: 이 땅의 통치권 문제는 앞의 2) 에서 이미 다뤘다. 성경에서 땅이라고 할 때 그것이 흙먼지 날리는 진짜 땅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원세호 님은 알아야 한다. 이 세상 나라(왕국) 임금은 사탄 마귀이다(요12:31, 엡2:2). 그는 이미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음에도 아직은 온 세상이 악한 자(사탄) 안에 처해 있다(요일5:19). 계11:15는 이 <세상의 왕국>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야 비로소 온전히 <그분의 왕국>이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성경기록들과 인간이 이미 땅의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원세호 님의 주장 중 어느 것이 참인지 다시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5) <원세호 님의 비판: ⑤ '워치만 니'의 24. p.12, 6-14줄의 주장은 순서가 문제이다. 예수님은 2000여 년 전에 이 땅에 육체로 오셨고 조건부적으로 모든 피조물 인간을 위하여 정죄 당하며 대신 심판을 받고 부활하셨다. 특히 죽음이 전 인류의 영, 혼, 몸을 침투하고 통과했으므로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 되었다. 그 이유는 영과 몸 즉 영혼에 죄가 들어 온 것이며(롬5:12) 영, 혼, 몸에 침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요한복음 3:16절대로 믿음으로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을 얻어지는 것이지 따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이다.>


** 반박: 워치만 니의 원문을 소개하고 반박해 보자.


<워치만 니 주장: ⑤ "죽음이 전 인류의 영과 혼과 몸을 침투했다. 사람의 어느 부분도 죽음이 통과하지 않은 곳이 없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구원의 길은 인간 개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개조나 수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죄는 죽음으로부터 구조가 있기 전에 정죄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24.(영에 속한 사람1) p.92).


위 워치만 니 주장은 매우 성경적이다. 원세호 님이 위에서 인용한 롬5:12의 바로 뒤 내용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즉 롬5:12 후반부는 타락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고 말하고 있다. <죽음이 전 인류의 영과 혼과 몸을 침투했다. 사람의 어느 부분도 죽음이 통과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워치만 니의 말은 사람의 타락으로 인한 죄와 사망의 오염이 인간의 일부만이 아니라 존재 전체에 미쳤다는 말이다. 주님도 눅 9:60에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라고 하심으로 거듭나기 전의 불신자들은 하나님 눈에 죄인일 뿐 아니라 죽은 자이기도 함을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죄인일 뿐 아니라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에 대한 구원의 길이 개조나 수리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이라는 워치만 니의 주장은 성경적이다. 이것을 문제 삼는 사람의 신앙이 오히려 의심스러울 뿐이다. 또한 <요한복음 3:16절대로 믿음으로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을 얻어지는 것이지 따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이다> 라는 원세호 님의 주장은 위 문맥과 동떨어진 말이다. 믿음으로 영생 얻는 것은 무엇이고 따로 생명 얻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런 말이 워치만 니 본문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


6) <원세호 님의 비판: ⑥ 구속은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거짓이다. 이 주장은 성경 롬8:29; 엡1:4-6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 태초, 천지창조 태초(창1:1) 이전 영원 영계에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다고 성경은 계시한다.> <⑦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는 구속이 없다. 결코 구속은 예정되지 않았다 '라고 주장한다>


** 반박: 이 점은 이미 1)번 글에서 충분히 반박했다. 원세호 님은 무엇이 예정된 것인가 하는 예정의 <대상>을 혼동하고 있다. 원세호 님은 이런 동일한 내용들은 하나로 묶어서 한꺼번에 다뤘어야 했다.


7) <원세호 님의 비판: ⑧ '구속이라는 것은 창조 가운데 얻지 못한 것을 회복하는 것이며, 구속은 창조목적의 수단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과 같이 구속이 회복인가? 거짓된 정의이다. 구속이란...속전을 받고 놓아주다, 속전을 받고 해방 시켜주다, 해방, 구속, 놓아줌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구속은 예수님이 대신 값을 성부 하나님께 드려서 인간은 죄 사함을 받음이다. 회복이 아니다. 이것도 거짓말이다.>


** 반박: 역시 워치만 니 본문을 인용하고 반박해 보자.


<워치만 니 주장: ⑧ "구속의 지위는 창조보다 더 높을 수 없다. 무엇을 구속이라고 하는가? 구속은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서 얻지 못하신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구속은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우리에게 준 것이다. 하나님은 구속을 통해서 창조의 목적을 이루신다. 구속은 화목하게 하고 회복시키는 것이지만 창조는 뜻을 세우고 정하신 것이다. 구속은 일보 후퇴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창조를 소홀히 하지 않고 구속을 모든 것으로 여기지 않기 원한다">(13. (거룩하고 흠이 없어라) p.23, p.24).


원세호님은 워치만 니 글 본문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오직 부정적인 비판에만 마음을 쏟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구속'을 설명하는 문장에서 '회복'이라는 단어 하나만을 따로 떼어내어 억지 비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원세호 님은 <...이들의 주장과 같이 구속이 회복인가? 거짓된 정의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위 워치만 니 글 어디에도 <구속을 단지 회복>이라고 말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이런 말을 했다는 가정을 전제한 원세호 님의 비판은 의미가 없다. (지방)교회 측은 성경상의 구속(redemption)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741


8) <원세호 님의 비판: ⑨ 타락 때문에 구속이 필요하나 하나님의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라 구속은 회복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회복이 무엇인가?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상태로 바로잡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담이 타락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 되었다. 그 이유는 모든 성도들은 에덴동산(땅에 있는)으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사함을 받고(회복이 아님) 영생하기 때문이다(골1:14; 요3:16). 회복이란 말 자체가 성경에 없다. 구속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다. 회복의 수단도 아니다....지방파는 성경에도 없는 '회복'을 사용하여 뜻을 변질시키는 것이다.>


** 반박: 본문을 인용하고 재 반박해 보겠다.


<위트니스 리 주장: ⑨ "타락 때문에 사람에게는 구속이 필요하다. 그러나 구속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다. 구속은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다. 구속은 단지 하나님의 회복의 과정이다. 구속은 타락한 사람을 하나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5.(사람의 영) p.45).


위 원세호 님의 짧은 인용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당신이 구속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에게 이뤄지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구속받은 한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함께 두신다. ...구속은 다만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최종적인 목적을 위한 하나의 과정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그분의 생명을 우리 안에 넣는 것이다. 그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넣는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엄밀히 말해서 거듭남은 우리의 타락과 아무 관계가 없다. 구속은 우리의 타락을 해결하지만 거듭남은 하나님의 목적을 해결한다".


위 단락의 소제목이 <거듭남과 하나님의 목적>임으로 위 문맥의 주제는 거듭남과 구속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이다. 그럼에도 원세호 님은 이런 문맥과 전혀 무관한 '회복'이란 단어 하나만을 트집잡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엔 원세호 님이 비판하는 '아담이 타락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란 언급이 전혀 없다. 이처럼 본문에도 없는 것을 가정하여 비판하고, 문장 중 한 특정 단어를 떼어내어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원세호 님은 <회복이란 말 자체가 성경에 없다>라고 단정하고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행3:21은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은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원세호 님은 성급한 단정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연구와 충실한 자료 조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3. 원세호 님의 (지방)교회 <은혜의 언약> 비판 재 반박


원세호 님은 <속죄언약>과 <은혜언약>을 자신의 비판 글 제목으로 각각 사용하고 있다. 두 개념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http://my.netian.com/~shinogil/study/studyb10.html) 그러나 그는 각기 다른 제목을 단 것이 무색해지도록 동일한 주제를 이곳 저곳에서 중복해서 다루고 있다. 원세호 님의 비판 내용도 앞글에서 다룬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이 대동소이하다. 그렇다면 이처럼 같은 내용들은 한 곳에 묶어서 한꺼번에 다뤄주었어야 좋았을 뻔했다.


아마도 여기 저기 산재한 자료들을 여러 사람이 발췌하여 자신의 교리 틀에 억지로 꿰어 맞추어 비판하려다 보니 이런 현상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원세호 님은 자신의 문하생들에게 책 2-4 권씩을 나눠주고 그들이 보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발췌하게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발췌된 내용들만을 토대로 이런 비판 글을 쓴 것 같다. 이처럼 원문의 전체 문맥을 고려치 않고 편견을 가지고 떼어낸 극히 일부 문장을 토대로 비판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변증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충분한 연구 검토를 거쳐 얻어진 자료를 토대로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을 권면하고 바로 잡아야 할 소위 이단감별사의 기본적인 사명을 저버린 처사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반박해 보겠다.


1) <원세호 님의 비판: ① '구속과 생명을 얻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속을 성취하였지만 구속과 관계없는 생명 얻는 일을 위하여 자신을 나눠주시는 일'이라 주장한다. 위의 주장은 크게 잘못되었다...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으심으로 조건부적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죄 사함을 받고(골1:14) 의로 인하여...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도록 허락되었다. 이미 구속은 죄에서 해방되고 생명 곧 영생을 얻는 것이지 다시 생명이 분배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크게 잘못된 주장이다>.


** 반박: 워치만 니의 원문을 인용 소개하고 반박하겠다.


<워치만 니 주장: ① "구속과 생명을 얻는 것과는 두 개의 명확히 구별되는 사실이다. 구속이란 우리의 죄를 처리하는 소극적인 면이다. 우리는 범죄 했으며 죽어야 마땅하다...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구속을 성취하셨다,...그러나 구속과는 관련이 없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독특한 면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하여 생명을 얻어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자신을 나눠주시는 일이다">(15.(교회) p.50).


독자들은 언뜻 보면 무엇이 쟁점인지 모를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워치만 니 주장은 <구속과 생명을 얻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원세호 님은 <구속은 죄에서 해방되고 생명 곧 영생도 얻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세호 님이 구속의 의미를 착각하고 있다. 즉 구속에 대한 진리인식이 선명하지 못함으로 원세호 님은 본의 아니게 거짓주장을 하고 있다.


엡 1:7은 <구속 곧 죄 사함>이라고 함으로 구속과 죄 사함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죄 사함이 곧 생명의 영접은 아니다. 이러한 죄 사함과 생명의 영접인 거듭남의 차이에 대해서는 앞의 서론 글에서 이미 충분히 다루었다. 참고로 일부를 재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죄 사함은 '예수의 피'로 인한 것이나 거듭남은 '생명 되신 예수님 자신'으로 인한 것이다. 죄 사함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된 것이나 거듭남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는다. 죄 사함은 하나님과 구속 주 사이에 '사람 밖'에서 이뤄진 사건인 반면, 거듭남은 그 구속주가 부활 후 '사람 안'에 직접 들어오심으로 체험된다. 예표 상 죄 사함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이뤄졌으나, 거듭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안에서 <어린양의 고기>를 먹음으로 체험된다. 로마서 5:10은 '(피로)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라 '고 말함으로 피로 인한 죄 사함과 화목을 생명으로 인한 구원과 구분하여 말한다...이처럼 죄 사함과 거듭남은 각기 다르다."


2) <원세호 님의 비판: ②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피는 죄를 처리하고 물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게 한다.'하며 이것이 주님의 옆구리가 주는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어이없는 주장이라 사료된다.>


** 반박: 먼저 위 내용의 출처인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의도>로 선별된 사건들만의 기록이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요20:30-31). 그러므로 요한복음 내용 중 베다니 촌의 나사로의 부활 같은 기적적인 사건 뿐 아니라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사례들조차도 그것이 실제 사실임을 믿음과 동시에 그 영적인 의미를 고려해 볼 수 있다. 다음 인용설명을 읽어보기 바란다. 결코 어이없는 주장이 아니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2788


<워치만 니 주장: ②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눠주시는 일을 상징하는 물을 쏟으셨다는 사실까지 내포하고 있음을 계시해 준다. 그런데 후자의 문제는 죄와 구속과는 상관이 없는 사건이다. 피는 우리 죄를 처리하고 있는가 하면 물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주님의 상하신 옆구리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내용이다">(15.(교회) p.51).


3) <원세호 님의 비판: ③ 로마서6:3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죽음과 부활을 그와 함께 하는 것이며, 십자가는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십자가는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인 것이다(롬6:6). 또한 십자가가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 없으며 십자가는 죄의 몸이 멸함 받는 것을 의미한다(롬6:6).>


** 반박: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다만 그분의 죽음만이 아닌 우리를 포함한 죽음이다(롬6:6). 우리는 이러한 함께 죽음의 사실을 롬6:3이 말하는 침례를 통해 믿음으로 체험하고 또 증거 한다. 그러므로 <침례>는 다만 형식적인 의식만이 아니다. 우리는 참된 침례를 통해 아담의 영역 안에서 태어난 우리가 또 다른 영역인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다. 다음 내용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808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809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5326 (갈3:27)


<워치만 니 주장: ③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롬6:3),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죽음과 부활을 그와 함께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다">(22(정상적인 교회생활) p.11).


4) <원세호 님의 비판: ④ 한 사람을 구원의 단위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에 반대되며 하나님의 정하신 길은 개인들만이 아니라 가정을 얻는 것이며, 노아의 8식구 구원이 증거인 것으로 주장한다. 위의 주장은 그럴 듯 하지만 잘못된 주장이다.


그 이유는 요 3장16절이 '누구든지' 믿으면 영생을 얻도록 약속되었다. 더욱이 사도행전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너희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 하셨는데, 이곳에 가로되는 3인칭 복수로 바울이 여러 말을 했으나 '주 예수를 믿으라 에서 '믿으라'가 단수이며, '네 집'도 단수이고 구원받는 것도 단수이다. 이 교훈은 구원받을 집은 모두 주 예수를 각각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행16:31). 히브리서 11장7절에 '믿음으로' 에서 노아는 '믿음으로'가 단수이며 개인적임을 나타내고 노아의 가정의 8식구도 같은 믿음으로 구원된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구원은 개인적인 증거가 많다(막5:34; 10:52; 눅3:6; 7:5; 8:48; 롬11:14; 고전1:21; 딛3:5; 히7:25). 집단 가족 구원은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이 아니다. 가족은 조직이며 조직은 개인이 단위이며 개개인의 신앙대로 구원되어서 그것이 가족이든 개인이든 믿음으로 구원된다. 지방파의 거짓된 주장은 또 다른 계획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 반박: 원세호 님은 <가로되는 3인칭 복수로 바울이 여러 말을 했으나 '주 예수를 믿으라 에서 '믿으라'가 단수이며, '네 집'도 단수이고 구원받는 것도 단수이다.> 라는 말에서 보듯이 지나치게 헬라어 단수 복수를 따진다. 원세호 님은 이러한 도움이 안 되는 헬라어 문법 설명이 논점을 흐려놓아 더 혼잡케 하는 면은 없는지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위트니스 리는 가족 중 한 사람이 구원받는 바로 그 순간에 다른 불신 가족들도 덩달아 구원받는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가정 단위의 믿음 생활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더 유익함으로, 복음전파 시 가족 중 어느 한 사람만이 아니라 온 가족을 구원받도록 하라는 권면의 말을 하는 것이다.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너희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약속의 말씀을 평이하게 읽고 믿고 또 이를 근거로 온 가족이 구원받도록 간구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 말이 어떻게 또 다른 계획이 있는 거짓된 주장인가? 원세호 님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비판을 자제하기 바란다.


<위트니스 리 주장: ④ "한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의 단위로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생각은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계획에 반대된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은 개인들만이 아니라 가정을 얻은 것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그 분의 구원의 단위를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홍수로부터 단지 노아와 그의 아내만 구원하지 않으셨다. 그 분은 또한 그들의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구원하셨다"(창7:7)>(17.(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훈련과 실행) p.94).


5) <원세호 님의 비판: ⑤ 사죄의 은혜(칭의)는 주님의 보혈로부터 오며 구원의 은혜(성화)는 주님의 십자가로부터...용서는 보혈로부터 오고 십자가에 오지 않는다는 진리의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크게 잘못된 주장이다. 그 이유는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으신 형틀이며... 십자가의 도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내용으로 한다. 보혈의 구속적인 역사를 십자가로 예표하신 것이다(고전1:18 ; 십자가의 도).


...위의 교훈에 의하면 십자가와 관련된 의미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포함한 십자가의 죽음인 것을 알 수 있다.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죽음은 나눌 수 없다. 십자가의 사역은 보혈의 사역과 구별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피는 (은혜)칭의, 십자가는 성화와 관련된 것이라 구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 마16:24; 눅9:23; 14:27등은 또 다른 의미로 고난을 상징하며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가 아니다. 그렇게 말할 바에야 못 숫자도 말하고 명패도 말하고 피가 몇 방울인지도 말해야 할 것 아닌가? 십자가는 형틀이며 예수님의 죽으심을 포함하고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는 십자가를 분리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 반박: 원세호 님은 위에서 많은 말을 했다. 그러나 그 핵심주장은 <십자가의 사역은 보혈의 사역과 구별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이런 주장이 옳은 것도 같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워치만 니의 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엉뚱한 비판에 불과하다.


왜 그런가? 워치만 니는 본문에서 로마서는 5장 11절까지는 복수의 <죄들>(sins)이 언급되는데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해결되었음을 전제한다. 그런 다음 롬5:12-8장까지는 복수의 죄들이 아니라 단수의 죄(sin)가 언급되고 있음을 주목한 다음 이 단수의 죄 문제는 보혈이 아니라 <주관적인 십자가의 체험>(마16:24)으로만 해결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